

[딜사이트경제TV 이승석 기자] #1. 1985년 8월, 도쿄 하네다공항을 출발해 오사카로 향하던 일본항공 123편은 이륙 10분 후 꼬리날개가 떨어져 나가는 사고로 군마현의 산자락에 추락했다. 탑승자 524명 중 520명이 숨졌다.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일본 사회에서 이같은 참사가 벌어지자 여론의 화살은 승객을 살리지 못한 기장 타카하마 마사미에게 집중됐다. 그러나 이후 블랙박스 기록이 공개되면서 상황은 180도 반전됐다. 블랙박스엔 기체가 완전히 조종 불능에 빠진 상태에서도 필사적인 노력으로 30여분간 비행을 계속했던 타카하마의 음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는 추락 직전 “이젠 틀렸어!”라는 외마디 비명을 남기고 산화했다.
#2. 2001년 11월12일 미국 뉴욕에서는 260명을 태운 아메리칸 항공 587편이 퀸스의 주택가에 추락했다. 승객 전원과 지상에 있던 5명이 사망했다. 9·11 테러가 일어난 지 불과 두 달 만에 또다시 뉴욕에서 항공 사고가 터지자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테러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을 밝힌 건 역시 블랙박스였다. 기체가 난기류를 만나자 부기장 스텐 몰린은 당시 아메리칸 항공의 비행 규정대로 꼬리날개의 방향타를 좌우로 다섯 차례 흔들어 난기류를 빠져나가려 했는데, 급격한 공기저항을 받은 꼬리날개가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기체에서 분리된 것. 아메리칸 항공은 이후 난기류를 탈출하기 위해 방향타를 조정하라는 규정을 삭제했다.
이처럼 사고 당시 상황의 기록은 사고 원인을 규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한 번 사고가 나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큰 항공기나 선박은 블랙박스 설치가 의무적이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화물 과적과 고박(固縛) 불량으로 드러난 것도 블랙박스 영상을 통해서였다. 사고는 돌이킬 수 없지만, 사고 이후의 미래는 바꿀 수 있다.

1950년대에 처음 도입된 블랙박스는 정보기술(IT)의 발전과 함께 진화를 거듭했다. 초기 비행기록장치(FDR)는 금속 호일에 데이터를 새기는 방식으로 자료를 저장했다가, 1970년대부터 저장 장치로 자기 테이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자기 테이프는 오래된 기술인 만큼 현재의 저장 장치들과 비교해 정보 처리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저장 용량만큼은 최신 매체인 SSD보다도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때문에 방송국이나 빅테크(거대기술기업) 등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보관해야 하는 곳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자기 테이프를 사용하고 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플로피 디스크, 하드디스크(HDD) 등과 같은 자기 디스크 방식이 쓰였다. 자기 디스크는 레코드 음반과 비슷하게 디스크를 회전시키면서 센서가 디스크에 입력된 데이터를 읽는 방식이다. 물리적인 움직임과 기계 장치가 있어야 하기에 충격이나 진동에 약하다. 1990년대부터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기반으로 한 디지털 저장 장치로 전환되면서 내구성이 한층 강화됐다.
2014년 말레이시아 항공 370편 실종 사건 이후로는 블랙박스조차 찾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비행 데이터를 클라우드로 실시간 전송하는 스트리밍 시스템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용 등의 문제로 아직까지 실제 적용된 사례는 없다.
이번 제주항공 사고기 블랙박스는 사고 직후 조사단에 의해 발견됐지만, FDR의 분석 장치가 분실되면서 국내에서 자료 추출이 불가능해졌다. 분석을 위해 미국으로 보내졌는데, 결과를 얻기까지 최소 수 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유가족에겐 고통스러운 시간일 것이다.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 당시 조난 신호인 ‘메이데이’를 외친 후 마지막 6분. 기장이 급히 뜯어낸 것으로 보이는 2000페이지 비상 매뉴얼(QRH) 중의 한 장과 끝까지 손을 떼지 못하고 사투를 벌이는 기장의 마지막 모습이 사고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말해 준다.
이처럼 기장이 엔진 두 개가 모두 꺼진 기체를 착륙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 남아있다. 이는 기체결함과 정비불량이 사고의 원인임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콘크리트 둔덕 탓만 하고 있다.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1차적 책임은 어디까지나 제주항공과 보잉에 있다. 결코 콘크리트 둔덕이 사고의 원인은 아닐 터.
마지막 순간 왜 랜딩 기어와 플랩(고양력장치)이 작동되지 않았는지, 사고 원인 규명의 키가 될 마지막 6분을 블랙박스가 풀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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